본당소개

오치동역사

광주대교구 소속

오치동(梧峙洞) 성당

오치동성당
소재 광주대교구 소속. 광주광역시 북구 우치로 311번길 12 (오치2동 668-90)
본당 설립 1983년 07월 10일
본당 승격 1985. 11. 10 중흥동 성당소속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
주보성인 성 바오로 사도 (축일 : 6월 29일)
관할구역 · 오치동 : 오치한전 ~ 오치아파트 도로 동쪽 제외
· 삼각동 : 국제고 후문 남쪽 지역
· 매곡동 : 전체
· 용봉동 : 일부 (유창 아파트, 대신 아파트)
자매결연 본당 신안 석문 성당
교세
한국천주교 신자 수 5,813,770명
– 총 인구(52,950,306명) 대비 천주교 신자 비율 11.0%
광주대교구 신자 수
(광주, 전남)
363,697명

– 광주, 전남 총 인구(3,398,163명) 대비 천주교 신자 비율 10.8%

본당관할지역 총 인구 수

 

48,600명

– 오치동 일부, 용봉동 일부, 매곡동, 삼각동 일부
총 신자 수(2019년 12월 기준) : 6,621명, 본당 신자 비율 13.6%

– 남자 : 2,818명 42.6%

– 여자 : 3,803명 57.4%

주일미사 참여율 874명 13.2%

– 전국 평균 미사 참여율 18.3% (2019년 1월 1일자)

1. 공소와 본당의 설립

광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광산군과 담양군의 양 군에 접경한 이 지역에 1983년 7월 10일 공소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겨우 10세대 미만인 교우 가정이 산재하여 교우 상호간에도 별다른 접촉없이 중흥동 성당 미사에 참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31사단 군부대에 사목상 출장을 다니던 전주교구 박중신(朴仲信, 시몬) 군종신부가 군부대 근처 삼일교회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10세대 교우들이 미사에 참여하러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박중신 신부가 이곳 교우들에게 매주 한 두 차례 성경공부와 성가지도를 해주었는데, 이때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비신자들도 교리공부를 하여 5명이 영세를 하였다.

또한 중흥동 성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던 여교우 4명(윤종심 우술라, 이애남 미리암, 이수원 유릿다, 조영희 레아)이 중흥동 본당 민 후고 신부의 허락을 받고 1982년 5월 6일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여 새 신자들을 입단시키고 오치동 윤종심 단장의 집에서 회합을 가짐으로써 오치동 본당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레지오 단원들의 정성어린 노력과 적극적인 봉사활동으로 신자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중흥동 본당의 부 마르띠노(M.Bourke) 신부가 적당한 장소가 마련되면 오치동에서 미사를 집전해 주겠다고 하여 1983년 6월 29일 오치동 650번지에 위치한 광산 김씨 대종각 사무소로 건립된 슬라브 3층 건물 중 1층을 전세 임대하였다.

이리하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주축으로 전 교우가나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시설과 비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불철주야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 1983년 7월 10일 부 마르띠노 신부의 집전으로 8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봉헌하고 오치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어 공소활성화를 위해 사도회를 조직하고 구역을 5개반으로 편성하여 신자들의 신심을 돈독히 하고 상호친교를 이루기 위한 반모임을 가졌다.

신자수가 차츰 증가하여 공소 구역을 7개 반으로 개편하여 본당 승격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1985년 8월 11일에는 이미 임대한 광산 김씨 대종각 사무소 3층의 일부까지 임대하여 교리실로 사용하는 등 공소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2. 본당 정착과 발전

1985년 9월 15일 중흥동 본당의 7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간 다위(David Sheehan; SSC)신부는 1984년 6월 24일 두암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음을 고려하고 오치공소가 지역이 넓고 도시의 발전으로 공소근처에 주택단지 조성을 위한 정지사업과 도로구획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지역적인 면에서 본당 소 공동체인 반모임이 활성화되고 4개의 쁘레시디움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기에 본당 승격의 전망이 있다고 교구청에 보고하였다.

이에 1985년 11월 10일 교구청 공문에 의하여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주임신부로 파 라흘린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1월 9일 많은 교우들과 뜻있는 인근 외교인들이 함께 참석하여, 비록 전세 건물에서였으나 중흥동 본당 간 다위 신부와 오치동 본당 초대주임신부로 내정된 파 라흘린 신부가 본당 설립을 축하하는 합동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때 중흥동 본당에서 분할된 구역은 서산동, 오치동, 매곡동, 일곡동, 삼각동, 우치동, 용전동, 용강동, 생룡동, 수곡동, 등이었으며 신자수는 165세대 440명이었다.

파 라흘린 신부는 본당으로서의 제반 여건이 미비한 실정을 감안하고 도시개발에 맞추어 장기적인 안목으로 본당을 육성하려 했다. 그래서 공소 시절의 사도회 임원을 그대로 임명하여 사도회 운영을 계속하도록 했으며,주택이 밀집되지 않고 흩어져 있어 주변 인구가 많지 않은 농업지역이고 변두리 개발지역이었기 때문에 신자가 서서히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사목하려고 했다.

본당 승격 후 첫 사목회 조직을 위한 예비모임에서 1987년 초대 사목회장으로 서장원(분도)씨가 임명되었다. 3대 공소회장인 박인동(바오로)씨가 성당부지(400평)를 봉헌하여 1987년 2월 19일 오후 4시 윤공희 대주교님을 모시고 박인동씨 자택에서 봉헌식 행사를 가졌다. 이어 3월 6일 박인동씨는 선종 하였다. 1988년 6월 3일 400평 외 200평을 더 구입하여 오치동 성당부지가 마련되었고, 1988년 7월 9일 성당건립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성당 신축을 위한 특별강론도 여러 차례 가졌다. 그러나 165세대 440명이란 신자로서는 성당건립기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그해 10월 골롬반회로부터 5,000만원을 5년 거치 4년 분할 상환조건으로 대출을 받아 설계에 들어갔고 1988년 11월 6일에는 성당부지에서 첫 야외미사를 드렸다.

제2대 주임신부 민 디오니시오 신부가 부임해 성당 건립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여 설계도가 확정되었으며 첫 오치동 주보가 발행되었고 연도회도 창립되었고 성당 건축 시공회사(대영토건)도 확정되어, 1989년 4월 22일 윤공희 대주교주례로 성전기공식을 가졌다. 그해 8월 지금껏 개인주택에 기거하시는 주임신부의 거취문제로 사제관 공사도 착공하였으며, 성전건립을 위한 경품권 30,000매를 발행하여 전신자가 광주, 전주교구 여러 성당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판매하였다. 그러던중 1989년 신자수의 꾸준한 증가와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이 가밀라 원장수녀, 임 벤자민 수녀)가 12월 9일자로 부임했다.

성당 건립을 위한 경품권 추첨과 바자회가 양일간에 걸쳐 성전부지에서 열렸는데 많은 지역민들과 함께 하였으며, 이어 12월 19일 사제관이 새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22일 새 성당 지하실(180평)에 마련된 임시 성당에서 첫 성탄 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전신자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1990년 3월 2일 성전 1차 공사가 완료되었고, 이어 담양본당 관할의 대치공소가 여러 면으로 신자들이 편리하기 때문에 오치동 본당으로 이전되었다.(115세대 193명) 그해 8월 26일 사도들의 모후 꾸리아(성인 Pr. 11개, 소년 Pr. 1개)가 창단되어 단장에 류용태(대건 안드레아)씨가 임명되었다.

1991년 6월 6일에는 성전공사가 완료되어 윤공희 대주교님 집전하에 축성식 미사가 봉헌되었는데 교구 신부님 및 신자들이 1,000여명 참석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신자수의 급증으로 20개 반에서 33개 반으로 재편성하였으며 92년 2월 12일 첫 보좌신부님으로 오 안드레아 신부(골롬반회)가 부임하였다.

많은 아파트 건립과 인구증가로 교육관과 사제관 및 수녀원 건립의 필요성에 따라 소공동체 조직을 21개 구역 80개반으로 재편성하였고 1994825일 서산동 본당을 분리하였다(250세대, 671). 12월 8일자로 교육관 골조공사와 수녀원이 완공되어 95년 12월 8일 수녀원 축복식이 거행되었으나 교육관 완공 공사가 과제로 남게 되었다. 새로운 개발지 일곡지구의 인구 유입으로 인하여 본당 신자수는 7,000여명에 달하여 삼각동 성당을 9924일 분리하였다(452세대, 1,258).

1999년 8월 1일자로 14년동안 오치동 본당의 설립과 발전에 공헌해온 골롬반회 신부들이 교구의 결정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고, 첫 방인 사제로 주임신부 강종훈(안드레아)신부와 보좌신부 이욱광(토마스)신부가 부임하였다. 주임 신부의 사목적 결정에 따라 10여년동안 본당발전에 공헌했던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가 2000년 1월에 철수하였고 95년 골조공사후 중단되었던 본당의 숙원사업으로 남아있던 교육관 완공공사와 사제관 건립공사가 재개되었다. 신자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봉헌으로 2000년 9월 17일에 교육관, 사제관 건립 기공식이 있었고, 2001년 5월 20일 소성당과 복지관 및 교리실을 갖춘 교육관과 더불어 새 사제관이 완공되어 본당발전의 새로운 기틀이 마련되었고,  2000825일에는 용봉동 성당을 분리시켰다(407세대,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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